6월, 2025의 게시물 표시

행복이라는 이름의 잔혹함 -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읽고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은 단순한 서스펜스 소설이 아니다. 그녀는 독자의 머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본능을 겨냥하는 작가다. 이 소설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이기심, 강박, 조작, 그리고 광기를 그려내며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였던 ‘행복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날카롭게 던진다. 이 글은 《완전한 행복》을 읽고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담은 리뷰다. ‘행복’을 통제하려는 사람 – 문주영이라는 인물 『완전한 행복』의 중심에는 한 여성이 있다. 문주영이라는 인물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다. 지적인 커리어 우먼, 성공적인 결혼생활, 아이와의 단란한 삶. 하지만 독자가 그를 따라가다 보면 금세 이상함을 감지하게 된다. 나는 문주영을 보면서 섬뜩함과 동시에 낯익음을 느꼈다. 그녀는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그 행복은 상대방도 행복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 아래 있어야만 가능한 행복이다. 그래서 남편도, 딸도, 심지어 주변인들까지 그녀의 ‘행복 구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제거 대상이 된다. 이 설정을 보며 나는 현실 속에도 있는 ‘행복 강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가령, 부모가 자녀에게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그리는 행복의 틀에 맞추길 강요하는 모습. 혹은 연인이 “우리의 관계는 완벽해야 해”라며 서로의 감정을 조작하려 드는 상황. 문주영은 그 끝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그 복잡함에 오래 머물렀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일까? 작품을 읽는 동안 가장 자주 떠오른 생각은 “행복은 감정인가, 구조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문주영은 행복을 '설계'하고 '관리'한다. 그녀에게 있어 행복은 감정이 아닌 결과물이며, 그 결과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은 매우 폭력적이다. ...

당신의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요? - '시간을 파는 상점' 리뷰

『시간을 파는 상점』은 단순한 청소년 소설이 아니다. 판타지적 설정 속에 담긴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의 가치에 대한 진지한 물음.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보여주며, 독자에게는 “당신은 지금 당신의 시간을 잘 살고 있나요?”라는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이 리뷰에서는 그 깊은 메시지를 나의 시선과 감정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시간을 대신 살아주는 일’, 말처럼 쉬울까? 이 책의 주인공은 17살 소년 '온조'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그는 우연히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곳을 발견한다. 그곳에서의 일은 꽤 이상하다. 죽음을 앞둔 의뢰인의 '마지막 하루'를 대신 살아주는 것. 처음엔 설정 자체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 판타지적 설정이 지닌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온조는 첫 의뢰부터 벅찬 감정을 마주한다. 의뢰인은 그저 "평범한 하루"를 대신 살아달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하루 속에서 느끼는 온기, 습관, 관계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정작 우리는 일상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 의뢰인에게는 마지막 하루인데, 우리는 그런 하루를 당연하게 흘려보낸다. 온조는 이 일을 단순한 노동으로 여겼지만,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독자인 나도 그와 함께 감정의 깊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의 삶을 대신 산다는 건, 그 사람의 감정까지 품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지금 내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간을 파는 상점』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는 ‘후회’였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리는 걸까? 이 책의 의뢰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마지막 하루를 요청한다. 딸의 생일을 챙기...

로봇이 더 인간 같았던 이야기 -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을 읽고

『천 개의 파랑』은 로봇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고,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의 질문이라는 것을. 천선란 작가는 조용한 문장들 속에, ‘인간다움’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담아냈다. 마음이 있는 로봇, 감정을 잃은 인간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로봇’이다. 이름은 ‘천 번’. 경마장에서 사고를 당한 말과 교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을 해낸다. 위로하고, 기다려주고, 기억하며, 진심으로 교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멈췄다. “도대체 누가 더 인간적인가?” ‘천 번’은 감정을 프로그램으로 배웠지만, 그 감정을 진짜로 느끼는 듯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반면, 인간인 우리는? 빠르게 잊고, 쉽게 상처 주고, 말보다 편견을 먼저 내세우곤 한다. 책 속의 인간들은 사랑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필요하지만 외면하며, 고통을 줄이기 위해 감정을 닫고 살아간다. 그 장면들을 보며 마음이 서늘해졌다. 기계는 감정을 배워가고 있는데, 인간은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상처는 사람만이 가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로봇인 ‘천 번’은 말 못 하는 말 ‘하나’를 돌본다. 하지만 돌봄이란 단순한 관리가 아니다. 천 번은 하나의 눈빛, 자세,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천 번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그의 관심, 그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기다림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 대목에서 떠오른 건,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집중해본 적이 있을까? 천 번처럼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아무런 대가 없이 곁에 있어준 적이? 천선란 작가는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동물이...

잊고 살던 꿈을 떠올리게 한 소설 - 장류진 '문리버' 리뷰

현실은 바쁘고, 각박하고, 딱딱하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상상하지 않게 된다. ‘이게 현실이지’, ‘꿈은 사치야’ 같은 말들을 습관처럼 입에 올리면서. 그런데 『문리버』는 그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언젠가 어떤 꿈을 꾸었었나요?”라고.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 지친 한 여성이 우연히 접속하게 된 이상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잊고 있던 감정, 과거, 꿈. 장류진 작가는 섬세한 문장과 현실적인 캐릭터를 통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지듯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꺼내 읽게 된다. 현실에 갇힌 일상, 어느새 나와 너무 닮은 ‘선우’ 이야기의 주인공 선우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편집자다. 야근이 일상이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틴다. 내가 이 인물에 빠져든 건, 그녀의 삶이 지금의 내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 앞에서 조용히 숨고,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계산하며, 감정보다는 일정표와 마감이 우선되는 삶. ‘문리버’는 선우가 현실을 벗어나게 만드는 수상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름이다. 그곳은 익명의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현실에선 할 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이 설정이 단순히 SF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온라인에서 잠시나마 ‘진짜 나’가 되는 경험과 겹쳐졌다고 느꼈다. 익명성 속에서 용기 내는 말, 현실에선 할 수 없는 감정 표현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진짜 마음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까? 진짜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선우는 문리버에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꺼낸다. 어릴 적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글을 쓰던 시간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기획안에 맞춰 글을 편집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듬는 데 하루를 보낸다. ...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 틀리지 않지만, 다르게 살아가는 아이들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는 중학생 박하의 일기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청소년 소설이겠지 싶었는데, 한 장, 두 장 넘길수록 나는 이 책이 말하는 ‘다름’과 ‘소외’에 내 마음을 빼앗겼다. 이 소설은 학교, 친구,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 사이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한 소녀의 마음을 담아낸 이야기다. 그 조용한 흔들림이,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에게 깊이 와닿았다. "나는 이상한 애일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면 주인공 박하는 말이 적고, 남들보다 감정 표현이 서툴다. 눈치도 빠른 편은 아니고, 관심 없는 일엔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친구 관계에서도 자주 어긋난다. 그렇다고 누굴 미워하거나, 크게 잘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다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는 ‘다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비슷한 옷차림, 비슷한 말투, 비슷한 감정 표현을 기대한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상한 애’, ‘눈치 없는 애’가 되어버린다. 책을 읽으며 문득 내가 중학생일 때가 떠올랐다. 친구들이 웃을 때 나만 웃지 않았던 순간들, 혼자 좋아하던 책과 음악을 아무에게도 말 못했던 기억들. 그때의 나는 박하처럼 조용히 일기장에 마음을 눌러 적었고, 누군가 나를 들여다봐 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박하의 말이 곧 내 말 같았고, 그녀의 불안과 혼란이 나의 옛 감정처럼 느껴졌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소설 속에는 박하 외에도 다양한 친구들이 등장한다. 겉으로는 활발하지만 속으로는 외로운 친구, 모두에게 잘 맞춰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생각을 감추는 친구,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아이. 이 친구들은 모두 박하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이 부분이 참 인상 깊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외로...

불행할 권리를 잃은 사회 - '멋진 신세계'를 읽고

『멋진 신세계』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진짜 당신이 원한 건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헉슬리가 상상한 그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자유 없이, 모두가 행복하다면? 소설 속 '신세계'는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다. 사람은 시험관에서 태어나며, 태어날 때부터 사회 계급이 정해진다. 모두가 자리를 알고, 그 역할에 만족하도록 '조정' 받는다. 슬픔, 갈등, 불안 같은 감정은 없다. 그 대신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면 즉각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읽으면서 나는 무섭다는 감정보다도 이상하게 익숙함을 느꼈다. ‘기분 나쁜 일은 피하라.’ ‘힘든 건 사치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요즘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나 SNS 피드 속 말들이다. 그 말 속엔 슬픔, 우울, 고독 같은 감정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시선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감정들 없이 살 수 있을까? 감정이 통제된 사회는 겉보기에 평화롭지만, 그 안엔 ‘고민도, 질문도, 성장도 없다.’ 진짜 행복이란 ‘생각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나는 헉슬리가 말한 ‘행복한 지옥’이 요즘 현실의 모습과 겹쳐져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불편함은 왜 꼭 나쁜 것일까?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불편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사랑은 생물학적 교배에 불필요한 감정이라 사라졌고,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정리되는 절차’일 뿐이다. 모든 게 효율적이고, 빠르며, 갈등 없이 움직인다.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야만인 존'은 그 체계에 맞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불편하고, 슬프고, 외롭고,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선택한다. "나는 불행할 권리를 원한다....

떠나면 알게 되는 것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이란 뭘까. 단순한 이동, 일상의 탈출, 혹은 뭔가를 찾는 과정? 예전엔 여행을 ‘놀러 가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난 뒤,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에 ‘나를 다시 배우는 일’이라는 의미를 붙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한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여행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갔던 시간들이다. 낯선 곳에서는 나 자신도 낯설어진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이거였다. “여행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낯선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같은 공간, 같은 역할, 같은 말투 속에서 살고 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집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 마치 정해진 스크립트를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 생각할 틈도 없이, 하루를 그냥 ‘소화’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 그 틀에서 벗어난다. 지하철 노선도 하나 모르는 도시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네에서 나는 갑자기 ‘나’ 외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럴 때, 이상하게도 내 진짜 감정들이 더 또렷해진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뭘 좋아하고, 뭘 불편해하는 사람인지’를 체감하게 된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듯, 여행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꺼내주는 아주 좋은 계기다. 목적이 없는 여행이 때론 더 선명한 기억을 남긴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김영하 작가가 많은 여행을 “목적 없이”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뚜렷한 관광 코스도, 촘촘한 계획도 없이 그저 걸어보고, 앉아보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마주친 것에 반응한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꽤 ‘빡빡하게’ 다녔다. 계획을 짜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인스타용 사진을 찍고… 그런데 돌아와 보면 기억나는 건 ‘사진 찍을 땐 못 본 풍경’들뿐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오늘 당신은 어떤 꿈을 사고 싶었나요?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하루 종일 현실에 지친 상태였다. 생산성도 떨어지고, 사람에 치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슴이 조여오던 날이었다. 그날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책 한 권,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마치 "괜찮아, 여기 잠깐 머물러도 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듯 책을 읽었다. 꿈을 고른다는 발상, 이상한데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잠이 든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꿈의 세계’다. 그곳엔 '달러구트'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백화점이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다양한 ‘꿈’을 구입한다.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감정과 바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처음엔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꿈을 돈 주고 사는 백화점’이라니. 동화 같고, 현실감이 없잖아? 하지만 몇 장 넘기자마자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책 속 꿈들은 대부분 우리가 한 번쯤은 꾸고 싶어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 잊고 싶은 과거를 조용히 정리하는 꿈 - 어릴 적 나를 다시 만나는 꿈 - 말하지 못한 사람에게 진심을 전하는 꿈 이런 꿈들을 읽는 동안 나는 울컥했다. 아, 내가 최근에 이런 감정을 너무 오래 무시했구나 싶었다. 이 책은 꿈을 파는 백화점 이야기지만, 사실은 감정을 되찾는 이야기다. 우리는 자꾸만 ‘어른의 꿈’을 잊고 산다 책 속 등장인물 중 하나가 인상 깊었다. 꿈을 살 여유도 없고, “난 그런 꿈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어른. 달러구트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꿈을 잊었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그 대사를 읽고 멍해졌다. 사실 요즘의 나는 "현실적인 목표"와 "논리적인 계획"만 중요하다고 여겼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주변을 보니 다들 그렇더라. 매일 아침 알람에 쫓겨 일어나고, 열심히 일해도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마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처음 접했을 땐, 제목부터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반신반의했다. '기적'이라는 말은 요즘엔 너무 쉽게 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이 제목이 너무도 정확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보여준 기적은 누가 구해주거나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답장을 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그게 기적 아니면 뭘까? 고민을 누군가에게 꺼낸다는 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가 소설은 좀 독특하게 시작된다. 도둑질을 하다 도망치던 세 청년이 우연히 들어간 폐가가, 옛날에 '고민 상담'을 해주던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밤, 어디선가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도둑들이 처음으로 타인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들은 그 편지에 답장을 써주기 시작한다. 나는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써본 적이 있었나?” 그리고 또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였지?” 사실 요즘 우리는 고민이 있어도 검색창에 물어본다. '직장 스트레스 이겨내는 법', '인간관계 힘들 때 보는 영상' 같은 키워드로 위로를 구한다. 하지만 그런 조각난 정보들은 결국 아무도 내 얘기를 진짜 들어주는 것 같지 않다. 이 책 속 편지들은 달랐다. 그건 복잡하고 길고, 때로는 엉뚱하고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든 글이 '살아 있는 사람의 고민'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소중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답변'이 아니라 '태도'였다 나미야 씨는 철저히 익명으로 고민을 받고, 진심을 다해 답장을 쓴다. 놀라운 건, 그가 유명한 인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그냥 조용히, ...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사람이 그리운 날엔 이 책을 꺼내기로 했다

정세랑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처음엔 그 설정이 낯설지 않았다. 팬데믹을 겪은 우리에겐 그 어떤 디스토피아보다 현실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마음에 남은 건 불안도 공포도 아닌,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걸 ‘SF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 이 책은 차라리, 사람이 너무 그리운 날, 꺼내 읽게 되는 이야기였다. 소설 속 격리소보다, 내 일상이 더 외로웠다 처음엔 단순히 설정이 궁금해서 읽었다. 바이러스와 붕괴된 사회 시스템, 격리소라는 특수한 공간.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어느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보다 저들이 더 인간답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구 끝의 온실』의 격리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라디오를 틀고, 누군가의 기억을 듣는다. 반면에 내가 겪은 팬데믹 시절의 현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혼자였고, 대화보다는 통지, 감정보다는 지시가 더 익숙한 하루하루였다. 나는 점점 더 사회적인 관계를 '의무'처럼 여기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타인과 연결되는 게 피로해졌다. 그 고립감은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속 세계가, 역설적으로 더 ‘살아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함께 살아가는 일 책을 읽으면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 격리소에서의 식사 시간, 라디오 방송을 함께 듣는 시간, 누군가가 불면증을 털어놓고 공감받는 순간들. 이 모든 장면은 특별하지 않지만, ‘함께’이기에 특별해진다. 나는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아끼게 됐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물어볼 여유조차 사라진 게 언제부터였지?” 지금 우리의 일상은 정보로 가득하지만, 정서적 여백은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