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 알게 되는 것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이란 뭘까. 단순한 이동, 일상의 탈출, 혹은 뭔가를 찾는 과정? 예전엔 여행을 ‘놀러 가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난 뒤,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에 ‘나를 다시 배우는 일’이라는 의미를 붙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한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 그리고 여행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갔던 시간들이다.
낯선 곳에서는 나 자신도 낯설어진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이거였다. “여행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낯선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같은 공간, 같은 역할, 같은 말투 속에서 살고 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집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 마치 정해진 스크립트를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 생각할 틈도 없이, 하루를 그냥 ‘소화’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 그 틀에서 벗어난다. 지하철 노선도 하나 모르는 도시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네에서 나는 갑자기 ‘나’ 외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럴 때, 이상하게도 내 진짜 감정들이 더 또렷해진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뭘 좋아하고, 뭘 불편해하는 사람인지’를 체감하게 된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듯, 여행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꺼내주는 아주 좋은 계기다.
목적이 없는 여행이 때론 더 선명한 기억을 남긴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김영하 작가가 많은 여행을 “목적 없이”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뚜렷한 관광 코스도, 촘촘한 계획도 없이 그저 걸어보고, 앉아보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마주친 것에 반응한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꽤 ‘빡빡하게’ 다녔다. 계획을 짜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인스타용 사진을 찍고… 그런데 돌아와 보면 기억나는 건 ‘사진 찍을 땐 못 본 풍경’들뿐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여행이란 익숙한 삶의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다.” 아, 나는 여행에서조차 ‘증명’하려 했구나 싶었다. 재미있었고, 잘 다녀왔고, 뭘 봤고… 그래야 뭔가 가치 있는 시간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말해줬다. “그냥 떠나도 된다. 목적 없이도 충분히 의미 있다.” 그 말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여행은 결과물이 아니라,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걸 나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실감했다.
여행을 멈춘 지금,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요즘은 여행이 어렵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일상은 바쁘고, 물가는 높고, 마음은 자꾸 무겁다. 그래서 ‘여행’이란 단어는 가끔 너무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그 모든 조건 없이도 여행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떠났을 때 비로소 보이게 되는 ‘나’의 모습이 중요한 것.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실제로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어느 날 혼자 낯선 골목을 걸어가는 상상을 하게 됐다. 그 상상만으로도 내 감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이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여행의 이유』는 여행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자기 탐색의 기록이다. 김영하 작가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자신을 다시 발견했는지를 담담히 풀어낸다. 이 책은 무계획 여행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익숙함 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워주며,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마음이 떠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삶이 단조롭고 감정이 무뎌졌다면, 무언가 새롭게 느끼고 싶다면, 『여행의 이유』는 충분히 따뜻한 시작이 되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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