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던 꿈을 떠올리게 한 소설 - 장류진 '문리버' 리뷰

현실은 바쁘고, 각박하고, 딱딱하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상상하지 않게 된다. ‘이게 현실이지’, ‘꿈은 사치야’ 같은 말들을 습관처럼 입에 올리면서. 그런데 『문리버』는 그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언젠가 어떤 꿈을 꾸었었나요?”라고.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 지친 한 여성이 우연히 접속하게 된 이상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잊고 있던 감정, 과거, 꿈. 장류진 작가는 섬세한 문장과 현실적인 캐릭터를 통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지듯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꺼내 읽게 된다.

현실에 갇힌 일상, 어느새 나와 너무 닮은 ‘선우’

이야기의 주인공 선우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편집자다. 야근이 일상이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틴다. 내가 이 인물에 빠져든 건, 그녀의 삶이 지금의 내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 앞에서 조용히 숨고,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계산하며, 감정보다는 일정표와 마감이 우선되는 삶. ‘문리버’는 선우가 현실을 벗어나게 만드는 수상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름이다. 그곳은 익명의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현실에선 할 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이 설정이 단순히 SF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온라인에서 잠시나마 ‘진짜 나’가 되는 경험과 겹쳐졌다고 느꼈다. 익명성 속에서 용기 내는 말, 현실에선 할 수 없는 감정 표현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진짜 마음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까?

진짜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선우는 문리버에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꺼낸다. 어릴 적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글을 쓰던 시간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기획안에 맞춰 글을 편집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듬는 데 하루를 보낸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나는 원래 무엇을 좋아했더라? 지금의 나는 그때 그 아이가 바라던 모습일까? 장류진 작가는 이 질문을 설교처럼 던지지 않는다. 대신 선우의 조용한 시선과 회상을 통해, 우리 안의 기억을 건드린다. 그래서 읽을수록 ‘이건 내 이야기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도 열리고 있는 것.

문리버는 환상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용기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오래된 꿈 하나를 떠올렸다. 실현되지 않았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그 꿈은 여전히 내 마음 한쪽에서 살아 있었다. 이 책은 그걸 꺼내주는 작은 열쇠였다. ‘문리버’라는 공간은 단지 상상의 장치가 아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심리적 피난처이자 회복의 장소였다. 선우가 용기를 내어 변화하듯이 이 책을 읽는 나 역시 내 안의 ‘문리버’를 다시 찾고 싶어졌다.

『문리버』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이지만, 그 본질은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다. 장류진 작가는 일상에 파묻혀 감정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조금은 상상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꿈을 잃어버린 것 같다면, 감정이 무뎌졌다면, 내 안에 무언가가 사라진 기분이라면, 『문리버』는 분명 조용히 마음을 건드릴 책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로봇이 더 인간 같았던 이야기 -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을 읽고

행복이라는 이름의 잔혹함 -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읽고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 틀리지 않지만, 다르게 살아가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