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할 권리를 잃은 사회 - '멋진 신세계'를 읽고
『멋진 신세계』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진짜 당신이 원한 건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헉슬리가 상상한 그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자유 없이, 모두가 행복하다면?
소설 속 '신세계'는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다. 사람은 시험관에서 태어나며, 태어날 때부터 사회 계급이 정해진다. 모두가 자리를 알고, 그 역할에 만족하도록 '조정' 받는다. 슬픔, 갈등, 불안 같은 감정은 없다. 그 대신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면 즉각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읽으면서 나는 무섭다는 감정보다도 이상하게 익숙함을 느꼈다. ‘기분 나쁜 일은 피하라.’ ‘힘든 건 사치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요즘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나 SNS 피드 속 말들이다. 그 말 속엔 슬픔, 우울, 고독 같은 감정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시선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감정들 없이 살 수 있을까? 감정이 통제된 사회는 겉보기에 평화롭지만, 그 안엔 ‘고민도, 질문도, 성장도 없다.’ 진짜 행복이란 ‘생각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나는 헉슬리가 말한 ‘행복한 지옥’이 요즘 현실의 모습과 겹쳐져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불편함은 왜 꼭 나쁜 것일까?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불편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사랑은 생물학적 교배에 불필요한 감정이라 사라졌고,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정리되는 절차’일 뿐이다. 모든 게 효율적이고, 빠르며, 갈등 없이 움직인다.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야만인 존'은 그 체계에 맞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불편하고, 슬프고, 외롭고,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선택한다. "나는 불행할 권리를 원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멍해졌다. 불행할 ‘권리’라니, 아이러니하지만 깊이 공감됐다. 요즘 사회는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세다. 우울하면 약을 먹고, 힘들면 상담을 받고, 그조차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감정을 느끼고 버텨보는 시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헉슬리는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이해하는 법’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분’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의 ‘신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 뉴스 대신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영상만 보고 - 감정보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느끼며 - 모두가 똑같이 웃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이런 사회에서 나답게 산다는 건 ‘소마’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조금 힘들어도, 불안해도, 깨어 있는 게 더 낫다고 믿는 것. 나는 『멋진 신세계』를 읽고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데,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멋진 신세계』는 지금의 우리에게 아주 오래된 경고장을 내민다. 진짜 행복은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감정을 겪고 이해하는 데서 온다. 불편함, 고통, 외로움은 모두 성장의 일부이며, 그걸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로 행복한가요? 그리고 그 행복은 진짜 당신의 선택인가요? 이 책은 당신에게 그 질문을 묻는다. 그 물음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깨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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