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더 인간 같았던 이야기 -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을 읽고
『천 개의 파랑』은 로봇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고,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의 질문이라는 것을. 천선란 작가는 조용한 문장들 속에, ‘인간다움’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담아냈다.
마음이 있는 로봇, 감정을 잃은 인간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로봇’이다. 이름은 ‘천 번’. 경마장에서 사고를 당한 말과 교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을 해낸다. 위로하고, 기다려주고, 기억하며, 진심으로 교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멈췄다. “도대체 누가 더 인간적인가?” ‘천 번’은 감정을 프로그램으로 배웠지만, 그 감정을 진짜로 느끼는 듯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반면, 인간인 우리는? 빠르게 잊고, 쉽게 상처 주고, 말보다 편견을 먼저 내세우곤 한다. 책 속의 인간들은 사랑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필요하지만 외면하며, 고통을 줄이기 위해 감정을 닫고 살아간다. 그 장면들을 보며 마음이 서늘해졌다. 기계는 감정을 배워가고 있는데, 인간은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상처는 사람만이 가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로봇인 ‘천 번’은 말 못 하는 말 ‘하나’를 돌본다. 하지만 돌봄이란 단순한 관리가 아니다. 천 번은 하나의 눈빛, 자세,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천 번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그의 관심, 그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기다림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 대목에서 떠오른 건,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집중해본 적이 있을까? 천 번처럼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아무런 대가 없이 곁에 있어준 적이? 천선란 작가는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동물이든, 로봇이든, 혹은 상처 입은 인간이든. 소설은 조용히 말한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걸 품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치유하고 있는 존재다
『천 개의 파랑』은 여러 인물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슬픔이 있고, 치유받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며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은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아주 깊고 진하다. 특히 좋았던 건, 이 소설이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슬픔을 함부로 덮지도 않고, 위로를 억지로 주지도 않는다. 천 번은 늘 묻는다. “기다려도 될까요?” “곁에 있어도 될까요?” 그 질문이 이 책의 핵심 같았다. 진짜 위로는, 기다리는 것에서 온다. 상대가 마음을 열 준비가 될 때까지 말없이 곁에 있는 것. 책장을 덮고 나서, 나도 나에게 묻게 됐다. 나는 누군가의 곁을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일까? 그리고 내 곁을 기다려준 누군가에게 충분히 고마워했을까?
『천 개의 파랑』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 같은 소설이다. 기계보다 더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히려 로봇이 ‘마음’을 전한다. 지금 당신은 감정을 잘 느끼고 있나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다려본 적이 있나요? 이 책은 그 질문을 조용히 던지고,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에서 한 템포 느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따뜻한 위로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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