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니페네거 '시간 여행자의 아내' - 사랑은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이 어긋나는 두 사람의 사랑.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SF적인 설정 위에 감정이라는 촘촘한 그물을 던진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기다림이라는 감정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오드리 니페네거는 시간보다 강한 감정이 있다는 걸 조용히 보여준다.

시간 여행보다 더 복잡한 감정의 거리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자 주인공 헨리는 시간 여행자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흥미진진한 SF적 모험이 아니라, 그는 원하지 않아도 시간에 휘둘리는 존재다. 반면 그의 아내 클레어는 늘 같은 자리에서 헨리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내가 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건, 이 설정이 단순히 환상적인 구조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의 순서를 무너뜨렸지만, 그 속에서 감정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헨리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고, 클레어는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모른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믿고, 기억하고, 연결된다.

시간이란 건 누구에게나 흐르지만, 누군가에겐 너무 빠르고, 또 누군가에겐 너무 느리다. 이 소설은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그 시간 속에 고여 있는 감정을 건드린다. 나도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약속도 확신도 없는 기다림. 그건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사랑이었다.

기다림은 감정의 가장 진한 형태

헨리가 시간 속을 튀듯이 이동할 때마다, 클레어는 어딘가에 남겨진다. 그녀는 울지 않는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 속에는 부재의 흔적이 가득하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클레어가 헨리의 부재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사라진다”는 말이 헨리에게는 일상이지만, 클레어에게는 그만큼 사랑의 감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다린다. 아주 조용히, 단단하게.

읽는 내내, 나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건 능동적 감정이 아니라 수동적 고통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큰 신뢰이자,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린 늘 사랑이란 걸 확인하고 싶어한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그런데 클레어는 그 확인조차 없이, 믿고 또 믿는다. 그건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슬펐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기억은 시간보다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남는다는 것이다. 헨리는 결국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클레어는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프기보다는 잔잔한 평화로움이 남았다.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란 건 그렇게 짧고 단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감정과 기억은 시간보다 더 오래 내 안에 머문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그래서 SF라기보다는, 감정의 소설이었다. 시간의 순서를 무너뜨렸지만, 그 속에서 감정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진짜 사랑이라는 건 시간과 상관없이 연결되는 감정일 수 있다는 걸 다시 믿게 됐다.

시간보다 단단한 감정이 있다는 것

오드리 니페네거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통해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위에 가장 현실적인 감정을 얹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이 책을 덮은 뒤, 나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기다렸던 사람, 혹은 나를 기다려준 사람.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은 짧았을지도 모르지만, 감정은 지금도 남아 있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감정은 머문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그 사실을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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