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을까?
『남아 있는 나날』은 한 사람의 인생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야기에 큰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속에 잔잔한 파장이 남는다. "내가 지나온 시간은 잘 살아온 것일까?" "그때 내가 했던 선택은 정말 최선이었을까?" 스티븐스라는 집사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삶의 장면들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품위라는 이름의 외로움
주인공 스티븐스는 평생을 '완벽한 집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매 순간 품위 있게 행동하려 애쓴다. 상사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개인적 감정보다는 직업윤리를 앞세운다. 그런 스티븐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때 함께 일했던 미스 켄턴을 다시 만나러 떠나는 여정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나는 스티븐스를 보며, ‘나는 지금 얼마나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자주 떠올렸다. 일에 치이고, 주변의 기대에 맞추느라 진짜 내 마음은 미뤄두고 있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티븐스는 늘 “그게 내 일이니까요”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엔 모든 감정을 접어두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을 리 없다. 억누르고 눌러두었던 것들이, 이제서야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만들어낸 거리
스티븐스와 미스 켄턴 사이에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예의 바르다. 그런데 그 조심스러움이 결국 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나는 이 부분에서 큰 울림을 받았다. 살면서 우리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그때 그냥 한 마디만 했더라면…" "그 순간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은 멀어지고,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스티븐스는 여전히 미스 켄턴을 '미스'라고 부른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지만, 그의 말 속엔 여전히 다가가지 못한 거리감이 있다. 그건 단지 예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자신도 깨닫지 못한 감정들이 그 거리감 속에 숨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선택과 삶을 돌아보는 구조로 진행된다. 그는 떠나는 여행길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끌어올린다. 그러면서 점점 깨닫는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 많은 걸 놓쳐버렸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내가 회피하고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고백이었다. 그 문장을 보고 나 역시 지금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나중에", "조금 더 준비되면", "언젠가"라고 말하며 소중한 감정이나 기회를 미룬다. 하지만 그 '나중'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 돌아봤을 때, 손에 쥐어진 건 후회뿐일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말한다. 남은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품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나’라는 사람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조금 어색하더라도, 지금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늦었다고 생각해도, 지금이 가장 빠른 때
『남아 있는 나날』은 아주 조용한 소설이다. 하지만 그 조용함 안에 수많은 후회와, 놓친 감정들과, 그리고 묻혀 있던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지금 당장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 짧은 말이지만, 그 말이 지나간 시간을 조금은 다시 잇게 해줄지도 모른다.
스티븐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깊이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늦은 감정도 괜찮아.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꺼내보라고. 그게 바로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남아 있는 나날’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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