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의 글은 언제나 그렇다. 어떤 이야기든 금방 끝나는 법이 없다. 여운이 길고, 문장을 되뇌게 만들고,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그런 점에서 특히 더 조용하고 깊은 책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 몇 개가 문득 깨어나는 걸 느꼈다. 분명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인데, 이상하게 책 속 한 문장이 닿는 순간 되살아났다. 마치 내가 지나온 어떤 ‘밤’과 ‘하루’를 다시 살아보는 것처럼.
잊혀진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책 속에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며, 잊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그 감정은 정말 사라진 걸까?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내 감정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나, 그때의 감정, 그 순간에 했던 말과 하지 못했던 말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분명한데, 때로는 그걸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미안할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말하지 못한 과거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삶 속에서 조용히 나를 만들고, 내 선택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거리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목소리가 큰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으로 많은 것을 말한다. 인물들은 쉽게 울지도 않고, 쉽게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짧은 말들, 혹은 말하지 않는 행동 속에 마음을 숨긴다.
나는 이 점이 참 좋았다. 모든 감정이 말로 표현되는 건 아니니까. 때론 침묵이 더 정직할 때도 있고, 어떤 말은 끝내 하지 않는 것이 서로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책 속 문장 사이사이에 아주 조용히 스며 있다.
읽다 보면 인물들과 내가 같은 온도로 느껴진다.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공감되는 순간들이 있다. 나 역시 말하지 못해서 놓쳤던 관계가 있었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던 적이 있다.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내가 이 소설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작고 조용한 감정의 조각들
김연수 작가의 문장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화려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고 단순해서 눈에 띄지 않는 감정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기 때문에 아름답다.
예를 들어, 어떤 하루가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 있었던 작은 마음의 흔들림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장면들을 읽으며, “아, 나도 그랬는데” 하고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작가가 내 마음속 어떤 부분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감정의 조각들이 가득하다. 누군가를 잊지 못해 마음 한쪽이 아렸던 날들, 말하지 못해 속이 답답했던 순간들, 기억에 남아 있지만 꺼내보지 않았던 표정들. 나는 이 책이 그런 것들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밤과 하루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읽고 나면, 어쩐지 조금 더 천천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더 많이 기억하고, 지금의 감정을 더 잘 느끼고 싶어진다. 너무 빨리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내가 놓치고 있던 감정들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책은 크고 거창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잊고 지낸 작은 감정들을 다시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해준다. “그 감정은 여전히 너 안에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나에게 이 소설은 하나의 다이어리 같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감정의 기록. 그리고 그 기록 덕분에 지금 내가 좀 더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조용히 숨어 있던 감정을 다시 불러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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