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아주 천천히, 거의 소리 없이 마음속에 들어온다. 『보통의 노을』이 그랬다. 김이설 작가의 단편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조용한 고백을 밤늦게 라디오로 듣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특별한 사건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읽는 동안 마음이 여러 번 멈칫했다.
제목처럼, 이 책은 ‘보통’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보통이 얼마나 많은 마음을 품고 있는지, 우리는 종종 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하루가 사실은 가장 무너졌던 날이기도 하니까.
조용한 무너짐을 이해받는다는 것
이 책 속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견디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경제적으로 무너져 있고, 누군가는 가족 안에서 소리 없이 망가져간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뭔가를 잃고 있는 중이다. 그 무너짐이 너무 작아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들. 김이설은 그걸 정확히 포착한다.
읽는 내내 “이건 내 얘기 같아”라는 생각이 반복됐다. 특히 어떤 인물은, 남들이 보기엔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사실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간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딱히 큰 문제는 없지만, 무언가가 계속 안쪽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이해받지 못할 외로움.
『보통의 노을』은 그런 감정을 말없이 꺼내 보여준다. 대신 울지 않아도 괜찮다고, 꼭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작가가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런 문장들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감정을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기 속마음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진하게 감정을 전한다. 나는 그 조용한 말 없음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일상에서 대부분의 감정을 말로 꺼내지 않는다. 그냥 괜찮은 척하고, 웃고 넘긴다. 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말들이 고여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 미뤄둔 고백, 꾹 눌러둔 분노와 체념들.
김이설 작가는 그런 감정들에 손을 얹는다. 소리치지 않고, 대신 천천히 다가간다. 마치 누군가 내 안의 고요한 아픔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희망이 아니라, 살아남음에 대한 이야기
이 책에는 뚜렷한 희망이 없다. 누구도 갑자기 구원받지 않고, 모든 게 해결되는 마법도 없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현실을 닮았다. 우리는 늘 완전히 나아지지 않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작품 속 인물들은 끝내 무언가를 이겨내지 않는다. 그 대신 묵묵히 버티고, 때로는 포기하면서, 그렇게 다음 날을 맞이한다. 나는 그 모습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이겨내지 못한 사람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는 것.
한 인물은 가족 안에서 조용히 지워지고 있었고, 또 다른 인물은 사랑과 무관한 삶에 익숙해져 버린다. 모두가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건 우리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이다. 대단한 이유 없이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오늘을 살아낸 당신에게
『보통의 노을』은 크고 강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노을이 그렇듯,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스며들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아무 일도 없었던 날들이 사실은 가장 많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걸 다시 느꼈다. 설명하지 못한 감정들, 울지 못한 슬픔들, 말하지 못했던 외로움들. 그게 다 나를 만든 하루하루였다는 걸.
만약 당신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큰 위로 대신, 조용한 공감을 건네는 이야기. “너만 그런 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문장들. 그게 우리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보통의 노을』은 그런 책이다.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아주 조용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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