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굴을 모른다』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소설이다. 그 침묵 속에 담긴 감정,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남은 마음들, 그리고 그 애매함을 글로 붙잡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내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함께 있던 시간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들의 진짜 얼굴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김봉곤 작가는 이 책에서 연애에 대해서도, 이별에 대해서도, 성장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장면 몇 개, 분위기 몇 줄,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그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걸 느끼게 한다.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그때’가 생각난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순간. 너무 많이 생각나서 말하지 못했고, 너무 간절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러다 그 관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어져 버렸다. 그 사람을 잊은 건 아닌데, 다시 연락할 명분도 없어졌고, 그러다 결국 시간 속에 파묻힌 그런 이야기.
주인공이 과거의 연인을 떠올리고, 그와 보냈던 어떤 밤을, 어떤 대화를, 어떤 표정을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쿡 찔렸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밤이 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눈빛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감정은 설명되지 않은 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김봉곤 작가는 그런 ‘말하지 않은 감정’을 참 섬세하게 그린다. 아주 조용하게, 솔직하지만 차분하게. 덕분에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내가 숨기고 있었던 마음, 그때 말하지 못했던 진심,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감정들.
관계는 늘 불완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이 소설의 제목, 『우리는 얼굴을 모른다』는 참 많은 걸 담고 있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계속 대화를 나눠도, 어느 순간엔 서로를 낯설게 느낀다. 이건 단지 연애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관계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오랜 친구 하나가 생각났다. 우리는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서로의 속마음을 완전히 공유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계기로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 친구의 얼굴을 진짜 몰랐구나’ 하고 느꼈다. 그건 외면의 얼굴이 아니라, 마음의 얼굴에 가까웠다.
소설 속 주인공도 그런 감정을 자주 느낀다. 연인이었지만, 결국은 서로를 몰랐다는 사실. 그것이 가슴 아프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것. 관계는 늘 어딘가 부족하고, 완전해질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늘 조금씩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그 감정의 리듬이 이 소설 안에 조용히 살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외로움과 사랑의 거리
이 책은 동시에 글쓰기와 고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인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자꾸만 글로 소환하고, 그 글 속에서만 솔직해진다. 나는 이 점이 너무 인상 깊었다. 말로는 못했던 걸 글로는 쓸 수 있다는 것. 그건 분명히 진심이지만, 동시에 너무 늦은 고백이기도 하다.
나도 글을 쓸 때면, 말로는 못한 것들이 툭 튀어나온다. 그 감정은 아직 살아 있고, 언어만 갖지 못했을 뿐인데, 어떤 문장과 만나면 비로소 말을 갖는다. 그건 때로 나에게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나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왜 그 감정을 그때는 말하지 못했는지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을 모른다』는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인 동시에, 나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말하지 못한 진심, 어긋난 타이밍, 지나간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걸 글로라도 남기고 싶은 사람.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관계를 기억하고, 감정을 붙잡는다.
결국 남는 건 말하지 않은 감정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묘하게 공허하다. 어떤 정리된 결말도 없고, 명확한 메시지도 없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진짜 같다. 우리가 살아온 관계들이 그렇지 않았나. 분명 서로를 좋아했지만 말하지 못했고, 함께했지만 끝내 오해했고, 어쩌면 서로를 사랑했지만 끝내 몰랐던 사람들.
『우리는 얼굴을 모른다』는 그런 모든 순간을 위한 책이다. 설명하지 않아서 더 기억에 남는 이야기, 말하지 않아서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감정.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동안 지나쳐왔던 감정들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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