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무겁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도 않은 이야기다. 귀신과 싸우는 보건교사의 이야기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코믹 판타지’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싸운다는 건, 결국 현실에서 외면당한 것들과 마주하는 일이고, 누군가가 보지 않으면 영영 아무도 보지 않을지도 모를 ‘작은 아픔’을 지켜내는 일이다.
‘보인다’는 건 ‘봐야만 한다’는 뜻일지도
주인공 안은영은 귀신처럼 생긴 젤리 형태의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유별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능력’은 그녀의 일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추가 업무처럼 그려진다.
이 설정은 아주 판타지적인데, 나는 오히려 굉장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도 ‘불편한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종종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괜찮다고 넘어가는 문제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누군가는 “그거 이상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서도 움직이는 사람
이 책이 특별한 건 은영이라는 인물을 영웅처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피곤해하고, 지쳐하고, “이 일 왜 내가 해야 하지?” 하고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또 움직인다.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은영은 보건교사다. 학생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진통제를 나눠주는 사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상처도 살핀다.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 있는 우울, 가족의 폭력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자신도 모르게 드리워진 무기력. 그 모든 것을 보며, “나는 그냥 보건교사니까…” 하고 돌아서지 않는다.
‘괴이한 것들’은 사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책 속의 세계에는 정말 많은 ‘괴상한 것들’이 등장한다. 젤리처럼 생긴 귀신, 괴상한 소리를 내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학교 옥상에 숨겨진 이상한 에너지.
이런 설정은 말 그대로 '판타지'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그 괴상함을 통해 ‘현실의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책에 등장하는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 모두 ‘무시된 감정들’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현실 속에서 비슷한 감정을 겪은 어른들을 떠올렸다. 말없이 책임을 감당하고, 드러나지 않게 뒷정리를 하는 사람들. 이 소설은 그 사람들에게 바치는 조용한 응원 같았다.
조용한 협력자, 홍인표
안은영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건 아니다. 국어 교사 홍인표는 그녀의 특수한 능력을 이해하고, 도움이 되어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홍인표라는 인물이 너무 좋았다. 그는 은영을 돕지만, ‘대신 싸우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은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녀가 조금 더 가볍게 일할 수 있게 작은 배려를 해준다. 보통은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통제’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홍인표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게 어떤 연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느꼈다. 같은 방향을 보되, 서로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 관계. 이건 단순히 연애 관계를 넘어 사람 사이의 건강한 거리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피는 사람들의 이야기
『보건교사 안은영』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묵묵히 책임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고, 그 문제 대부분은 보려 하지 않으면 영영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어디선가 은영 같은 사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나도 누군가의 은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했고,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조금은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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