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힘은 어디에 있을까 - '어스시의 마법사'가 던진 질문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는 마법과 용, 예언과 모험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곧 알게 된다. 이 이야기는 판타지의 탈을 쓴 깊은 성찰의 이야기이며, 무엇보다 ‘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읽고, 오랜만에 책장을 덮은 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강함’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내 그림자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힘이란, 마법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었다

주인공 '게드'는 선천적인 재능을 지닌 소년 마법사다. 처음엔 스승도 놀랄 만큼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고, 일찌감치 마법학교에 들어가며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바로 그 '강한 힘'은 그를 위험하게 만들고 만다.

게드는 교만과 질투로 인해 어둠의 존재를 불러들이고, 그 결과 그는 평생 자신이 만든 그림자를 쫓게 된다.

나는 이 설정이 단순히 환상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저지르는 실수와도 닮았다고 느꼈다. 열정이 넘쳤던 시절,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앞섰던 순간들. 하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는, 항상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된다.

게드는 힘을 얻은 대신 책임을 배운다. 그리고 그 책임이란, 단순히 누군가를 지키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용기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그는 끝끝내 이해하게 된다.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 나를 인정하는 일

게드가 맞서 싸우는 ‘그림자’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그것은 게드 자신이 억눌렀던 자아의 어두운 면, 즉 그의 두려움, 분노, 교만, 욕망이 형태를 갖춘 존재다.

나는 멈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하나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침착하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인정받고 싶고, 불안하고, 때론 누군가를 이기고 싶어하는 감정이 들끓는다.

게드는 그 그림자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결국 그것과 하나가 됨으로써 진짜 힘을 얻게 된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것. 그게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말해준다.

이름을 안다는 것, 존재를 인정하는 것

어스시 세계에서 이름은 곧 힘이다. 무언가의 ‘진짜 이름’을 알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마법사들은 진짜 이름을 숨긴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 설정이 너무도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을 알아가고, ‘이름’ 대신 그 사람의 서사를 껴안는 노력을 한다.

게드가 자신의 그림자의 이름을 부르고, 그 존재를 품에 안는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 결말이 아니다. 그건 ‘나’를 직면하고, 온전히 인정하는 장면이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한동안 가슴이 뜨거워졌다.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 더 세지고, 더 빨라지고, 더 위로 올라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스시의 마법사』는 “그 전에, 네 그림자와 먼저 마주하라”고 말한다.

성장소설의 고전, 마법보다 깊은 이야기

『어스시의 마법사』는 마법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현실적인 성장 이야기다. 힘이란 무엇인지, 진짜 강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나 자신을 완성시켜야 하는지를 묻는다.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고민하게 됐다. 내가 숨기고 있는 그림자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나의 진짜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어슐러 르귄은 단지 마법 이야기를 쓴 게 아니다. 그녀는 독자에게 묻는다. “너는 너 자신을 진짜로 알고 있니?”

이 소설은 그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서 있는 ‘게드’를 보며 우리도 언젠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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