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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건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어디가 앞인지, 끝이 있는지 알 수 없는데도 자꾸 걸어가게 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읽고 나면, 단지 그 남자의 기억을 따라간 게 아니라, 나의 과거, 나의 감정, 나의 공백을 따라간 것 같아진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직접적인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특유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내면 깊숙한 곳을 자극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이 이야기를 '나의 것'처럼 느끼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 자기 자신이 낯설었던 순간이 있으니까.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어떤 기억이 지워진 것 같은지 스스로 물어봤던 적이 있으니까.

기억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귀이’는 기억을 잃은 사립 탐정이다. 그는 자기 과거를 쫓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부탁도 아니고, 거창한 이유도 없다. 단지, “나는 누구였을까?”라는 질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예상보다 훨씬 무겁다.

처음엔 단순한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이름, 주소, 관계를 하나씩 복원하면서 실마리를 찾는 여정. 하지만 책장이 넘어갈수록, 이건 단순한 퍼즐이 아니라 감정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귀이는 자신이 잊은 것보다, ‘잊혀진 방식’으로 살아온 삶을 마주하게 된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어떤 일을 잊었다기보다는, 그냥 내 인생에서 그 장면을 지워버린 느낌. 사실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 모디아노는 그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아채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무섭고, 더 다정하다.

이름 없는 골목, 말없이 흐르는 시간

이 책은 파리의 골목을 끊임없이 떠돈다. 주소, 거리 이름, 오래된 호텔과 아파트. 구체적인 공간이 계속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낯설다. 풍경은 선명한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희미하다. 주인공처럼.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장소는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때의 감정은 흐릿하고, 함께 있었던 사람의 말은 잊고, 표정은 지워진다. ‘어디에 있었는가’보다 ‘어떻게 있었는가’는 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모디아노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의 기억과 도시의 시간을 연결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장소 같기도, 꿈에서 본 거리 같기도 하다. 그 흐릿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뭔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그 안에 머무는 느낌.

내가 나였던 흔적들을 찾아가는 일

귀이는 과거를 추적하지만, 결코 완전히 되찾지는 못한다. 어떤 건 이미 사라졌고, 어떤 건 애초에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완벽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질문은 끝까지 남겨둔다. 그래서 여운이 길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지만, 감정은 진하다. 나도 책을 다 읽고 나서 정확히 줄거리를 정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로 이어진다. 귀이의 여정은 끝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따라가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지금 이 삶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라는 질문을 갖고 말이다.

기억보다 감정이 오래 남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조용한 책이다. 겉으로는 큰 사건도 없고, 인물들의 감정도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 덮어놓은 기억, 놓쳐버린 선택이 가득하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마음을 흔드는 작가다. 이 책은 내가 잊었다고 믿었던 어떤 감정을 다시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책장을 덮고 나면,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다시 떠올린다.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길을 걸었고, 그중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을까. 그리고 그 잊힌 것들 속에, 진짜 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잊힌 기억 속에서, 우리는 아주 조금씩 다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